기획연재

김영사가 기획한 특별한 즐거움.
책과 함께하는 재미가 가득합니다.

대변동

<백세 일기> - 김형석

Chapter 4.#4. 공 좀 찼던 철학 교수

러시아 월드컵 경기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 경기가 있는 줄 알면서 잘 수도 없고 응원을 하고 나면 피곤해진다. 내가 축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응원하게 된 것은 축구 이외의 경기를 모르기 때문이다. 다른 스포츠는 접촉해보지도 못했고 문외한이다.

초등학교 때는 동네 아저씨가 만들어준 볏짚 뭉치로 공을 찼다. 그러다가 고무공 차기를 즐기면서 중학생이 되었다. 체육 시간에는 간혹 축구 경기를 하는 때도 있었다. 대학생이 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축구와의 인연이 끊겼다.

30여 년 세월이 지난 뒤였다. 연세대학교의 일곱 개 단과대학 교수들이 친선 축구 경기를 갖기로 했다. 불행하게도 우리 문과대학 교수 중에는 축구 경험을 갖춘 교수가 거의 없었다. 할 수 없이 내가 앞장서서 팀을 구성하고 시합을 위한 훈련을 맡게 되었다. 나는 선수이면서 주장의 책임을 맡는 처지가 되었다.

어쨌든 첫해의 우승기를 차지하게 되었으니까, 내 노력도 적지 않았던 셈이다. 교수 모두가 청소년 못지않게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신과대학의 M 교수는 나를 찾아와 신과대학이 이길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1970년도 가을에 열리는 연고전 경기에는 교수 축구팀도 출전하게 되었고 나도 시니어 팀의 주전 선수로 뽑힌 것이다. 유니폼을 입고 서울 동대문 경기장에 나섰더니 고려대학교의 조동필 교수가 연세대학교에 얼마나 선수가 없으면 김 선생까지 나왔느냐고 놀려주었을 정도였다.

연세대학교 교수팀이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나는 오른쪽 공격수로 뛰었다. 우승하고 두 대학의 응원단이 환호성을 올리는 가운데 우승대 앞으로 나서는 나 자신이 자랑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국제 경기는 못 되지만 일약 인정받는 선수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 당시에 꽤 많은 독자를 차지하던 신문 <일간스포츠>에는 대한축구협회 회장 장덕진 씨와 나의 ‘한국 축구의 현실과 미래’ 비슷한 제목의 대담이 실렸다. 고려대학교 출신인 장 회장이 대담 상대로 나를 선정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뜻하지 않게 축구선수가 되었고 마치 축구계의 주목받는 인사로 등극하기도 했다.

50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내가 왕년에 축구 선수였다고 해도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다. 신장 162센티미터와 체중 55킬로그램의 철학 교수가 축구 선수라니, 나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동대문 잔디구장에서 활약하던 사진이 남아 있어 손주들에게 보여주기도 하며 때로는 고등학생들에게 스스로 자랑해보기도 한다.

“결론은 간단하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 나도 축구를 전공했다면 박지성 선수만은 못해도 성공하고 돈도 벌었을 것이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