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김영사가 기획한 특별한 즐거움.
책과 함께하는 재미가 가득합니다.

대변동

<우먼 인 윈도> - A. J. 핀

  • 다른회 보기
  • 1
  • 2
  • 3
  • 4
  • 5

Chapter 5.지금 진료중 님이 여러분을 만나러 갑니다.

10월 29일

금요일

 

낮에는 프랑스어 수업, 밤에는 〈디아볼릭〉 감상. 쥐새끼 같은 남편, 타락한 아내, 정부, 살인, 사라진 시체. 사라진 시체라니.

하지만 일단, 처리할 일이 있다. 나는 약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마우스를 한쪽으로 가져가 비밀번호를 입력한다. 아고라로 로그인.

그곳에는 때를 막론하고 최소 여남은 명의 사용자들이 접속해 있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일단의 사람들. 그중 몇몇은 나도 이름을 알고 있다. 베이 에리어의 탈리아, 보스턴의 필. 변호사답지 않은 이름을 가진 맨체스터 출신의 변호사 밋치. 볼리비아인인 페드로. 자주 끊기는 그의 영어 실력은 나의 엉터리 프랑스어보다 나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닉네임으로 불린다. 나도 마찬가지다.

아주 잠깐 동안, ‘광장공포증 애나’라는 닉네임을 사용했다. 하지만 내가 정신과 의사라는 사실을 밝히자 빠른 속도로 말이 퍼져나갔다. 그래서 지금 닉네임은 ‘진료중’이다. 지금 진료중 님이 여러분을 만나러 갑니다.

 

광장공포증.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열린 공간에 대한 공포. 실질적으로는 일련의 불안장애를 일컫는다.

1800년대 후반 최초로 보고되었고, 그 후 한 세기가 지나서야 ‘독립된 진단적 실재’로 분류되었다. 흔히 공황장애에 동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한다면,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 제5판’을 확인하시길. 줄여서 DSM- 5라고 불린다. 언제 들어도 기분 좋아지는 이름이다. 시리즈 영화의 제목 같지 않은가. “<정신장애4>를 좋아하셨나요? 그렇다면 속편도 보세요!”

의학보고서들은 진단을 내림에 있어 이례적인 창의성을 보여준다. “광장공포에는…… 집 밖으로 혼자 나가는 것, 군중 속에 있는 것, 줄을 서는 것, 다리 위에 서 있는 상황 따위가 포함된다.” 다리 위에 서보기라도 해봤으면 좋겠다. 제기랄, 줄이라도 서봤으면. 다음 부분 역시 마음에 든다. “영화관 한가운데에 앉아 있을 때.” 정중앙 자리라니, 대단합니다! 관심이 있다면, 113페이지에서 133페이지까지 읽어보시길.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싸우는 우리 중 대부분은 집에 묶여 있다. 밖에 있는 더럽고 복잡한 세상으로부터 숨어 있다. 나는 드넓은 하늘, 끝없는 수평선, 단순한 노출, 야외에 있다는 미칠 것 같은 스트레스로부터 숨어 있다. ‘열린 공간’.

DSM-5가 애매하게 지칭하는 그 내용은 186개의 각주로 정의되어 있다.

의사로서, 나는 환자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병원에서도 마찬가지로 얘기한다. 환자로서의 나는 (이편이 맞는 말이리라) 광장공포증이 내 삶을 망가뜨렸다고 말하는 대신, 차라리 내 삶이 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아고라의 첫 화면이 나에게 인사한다. 나는 게시판을 훑으며 대화방 기록을 걸러낸다. 석 달간 집에 갇혀 있었어요. 그래서요, 카라88 님. 여기 열 달이 넘어가는 사람도 있다고요. 제가 아고라에 의존하는 경향이 생긴 걸까요? 광장공포증보다 사회공포증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이는군요, 일찍 일어나는새 님. 혹은 갑상선 문제 일 수도 있어요. 여태 직업이 없어요. 세상에, 메건 님. 어떤 마음인 지 알아요, 유감이로군요……. 에드 덕분에 나는 애써 직업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내 환자들이 그립다. 그리고 그들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신규회원이 메일을 보내왔다. 지난봄 급조해둔 생존 매뉴얼을 그녀에게 보내주었다. “그래서, 공황장애가 있으시다고요”라는 말 과 함께. 내 생각에는 꽤나 유쾌한 말이었으니까.

 

Q: 먹는 건 어떻게 해결하나요?

A: 블루 에이프런, 플레이티드, 헬로 프레시…… 미국에는 우리가 이용 가능한 수많은 배달 업체들이 존재한답니다. 해외에 계신 분들도 비슷한 배달 서비스 업체를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Q: 약은 어떻게 구하죠?

A: 미국 내 주요 약국들은 모두 직배송을 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

면, 담당 의사에게 지역 약국에 말해달라고 하세요.

Q: 집 청소는요?

A: 청소하셔야죠! 청소 대행업체를 부르거나, 직접 하시면 됩니다.

(나는 둘 다 안 한다. 물티슈로 대충 훑고 만다.)

 

Q: 쓰레기는 어떻게 내다버리죠?

A: 미화원이 해결해주거나, 친구에게 부탁해야죠.

 

Q: 지루함은 어떻게 해결하나요?

A: 이제 본격적으로 어려운 질문들이 나오는군요…….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전반적으로 이 매뉴얼에 만족했다. 나에게 매우 유용하기도 했고.

방금 화면에 대화창이 떴다.

 

sally4th: 안녕하세요. 선생님!

미소를 짓느라 입술에 경련이 일었다. 샐리. 26세, 퍼스 거주, 올해 초 부활절 일요일에 최초 발병. 팔이 부러지고 눈과 얼굴에 심각한 타박상을 입었으며 강간범의 신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음. 세상에서 가장 고립된 도시에 고립된 채 넉 달을 실내에서 보냈지만, 현재 집 밖으로 나온 지 10주째. 그녀의 말에 따르면, 상담치료와 혐오요법치료, 프로프라놀롤이 잘 들었다고 한다. 역시 베타차단제만 한 것이 없다.

 

진료중: 안녕하세요? 잘 지내요?

sally4th: 그럼요! 오늘 아침엔 소풍도 다녀왔는걸요!

 

그녀는 느낌표를 사랑했다.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릴 때조차도.

 

진료중: 어땠어요?

sally4th: 살아남았습니다! :)

그녀는 이모티콘 애호가이기도 했다.

 

진료중: 생존자로군요! 인데랄*은 어때요?

sally4th: 좋아요. 80밀리그램으로 줄였어요.

진료중: 하루 두 번?

sally4th: 한 번요!

진료중: 최소투여량이군요! 잘됐다! 부작용은?

sally4th: 안구건조증요, 그런데 그게 다예요.

 

잘된 일이었다. 나도 다른 약들과 함께 비슷한 약을 먹는 중이지만, 때때로 뇌가 파열되는 듯한 두통에 시달린다. 프로프라놀롤은 편두통, 부정맥, 호흡곤란, 우울증, 환각, 심각한 피부반응, 구토, 설사, 성욕 감퇴, 불면증 및 졸음을 유발할 수 있다. “약은 부작용을 위해 존재하는 거야.” 에드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자연발화 같은 거라고 해두지.” 나는 제안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죽음을 천천히, 오래 끌고 가는 거지.”

* 프로프라놀롤의 상표명.

 

진료중: 재발한 적은 없나요?

sally4th: 지난주에 경련이 좀 있었어요.

sally4th: 하지만 견뎌냈어요.

sally4th: 숨쉬기 훈련으로.

진료중: 종이봉투는 오래된 처방이죠.

sally4th: 막상 효과가 있으면 바보가 된 기분이 들어요.

진료중: 그렇긴 해요. 하지만 잘했어요.

sally4th: 감사해요. ;)

 

나는 와인을 홀짝였다. 다른 대화창이 켜졌다. 앤드류, 고전영화 팬 사이트에서 만난 남자였다.

 

앤드류: 이번 주말, 앤젤리카 필름센터에서 그레이엄 그린* 시리즈 볼래요?

 

나는 망설였다. 〈몰락한 우상〉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였다.

불운한 집사, 운명적 종이 비행기. 게다가 〈공포의 내각〉을 본 지도 십오 년이나 지났다. 물론 늘 에드와 함께였다. 하지만 앤드류는 나의 상황에 대해 알지 못한다. ‘못 갈 것 같아요’라는 말로 상황을 요약했다. 나는 샐리에게 돌아갔다.

 

* Graham Greene, 영국의 소설가, 극심한 우울증을 극복하고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몰락한 우

상>과 <공포의 내각>은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제작된 영화들이다.

 

진료중: 상담사와는 잘 지내고 있는 거죠?

sally4th: 그럼요. ;) 감사해요. 일주일에 한 번 상담받아요. 엄청 잘하고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진료중: 잠은 잘 자요?

sally4th: 아직도 악몽을 꿔요.

sally4th: 선생님은요?

진료중: 나는 잠을 많이 자요.

 

사실, 너무 많이. 필딩 박사에게 말해야 하는데, 과연 그럴지 나도 알 수 없다.

 

sally4th: 선생님은 어때요? 잘 싸우고 있나요?

진료중: 아직 멀었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란 놈이 워낙……. 그래도 난 강한 사람이니까요.

sally4th: 맞아요!

sally4th: 여기 친구들이 잘 지내나 확인하러 들렀어요. 항상 선생님 생각을 한답니다!!!

 

프랑스어 선생님이 스카이프로 전화를 걸어오자, 나는 샐리와의 대화를 애써 끝냈다. “봉주르, 이브.” 혼자 되뇌고 전화를 받기 전 잠시 머뭇거린다. 순간, 내가 그와의 통화를 얼마나 간절히 기다려 왔는지 깨달았다. 그의 얼굴에 짙은 혈색을 선사하는 칠흑 같은 머리카락. 나의 이상한 발음 때문에 당황할 때마다 미간으로 몰려들며 악상 시르콩플렉스*처럼 휘어지는 눈썹.

앤드류가 다시 말을 걸어온다면 이번엔 그를 무시하리라. 영원히. 고전영화는 에드와 함께하는 것이다. 다른 누가 끼어들 수 없다.

 

나는 책상 위 모래시계를 뒤집는다. 위에서 알갱이가 떨어질 때마다 일렁이는 작은 모래 피라미드를 지켜본다. 긴 시간이었다. 거의 일 년. 거의 일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나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뭐, 거의 그렇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8주에 걸쳐 다섯 번 정도, 나는 밖으로 나가려고 시도 중이다. 집 뒤, 정원으로. 필딩 박사의 말을 빌리자면, 나의 ‘비밀병기’는 우산이다. 그것은 에드의 우산

이었는데,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런던포그 제품이었다. 내가 우산을 방패 삼아 문을 열면, 곧 부서질 것 같은 필딩 박사가 정원에 허수아비처럼 서 있을 것이다. 스프링이 휘리릭 하는 소리를 내고 우산이 펼쳐진다. 나는 우산의 몸통이 이루는 곡면과 우산살,

그리고 그 안쪽을 열심히 노려본다. 짙은 타탄체크 무늬를 이루는 검은 사각형 네 칸이 우산살 사이를 메우고, 씨실과 날실을 이루는 하얀 선 네 개가 교차한다. 네 개의 사각형, 네 개의 선. 검정색 넷,

흰색 넷. 숨을 들이쉬고, 넷까지 센다. 숨을 내쉬며, 넷까지 센다. 넷. 마법의 숫자.

우산은 마치 검처럼, 방패처럼, 곧장 앞으로 뻗어 있다.

그제야 나는 밖으로 걸음을 뗀다.

 

내쉬고, 둘, 셋, 넷.

들이쉬고, 둘, 셋, 넷.

 

나일론이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나는 계단 하나를 내려간다(계단도 네 개다). 하늘을 향해, 아주 조금, 우산을 들어, 박사의 신발과 정강이를 훔쳐본다. 세상이 나의 시야로 쏟아져 들어온다. 다이빙

벨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물처럼.

“비밀병기와 함께라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필딩 박사가 소리 친다.

이건 비밀병기가 아니잖아. 나는 울고 싶다. 이건 망할 우산이라고. 벌건 대낮에 하늘을 가르는 우산.

내쉬고, 둘, 셋, 넷. 들이쉬고, 둘, 셋, 넷. 그러자 예기치 않게 주문이 효과를 발휘했다. 나는 층계를 내려와(내쉬고, 둘, 셋, 넷) 풀밭을 몇 미터 가로질렀다(들이쉬고, 둘, 셋, 넷). 공포가 샘솟고, 치솟는

파도가 나의 시야를 덮고, 필딩 박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기까지. 그리고 그다음은……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도서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