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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수유병집-글밭의 이삭줍기> - 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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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누가 옛사람을 죽은 사람이라고 말하는가_고전의 매력

나는 대학에서 고전문학, 그것도 한문학을 강의하는 고전학자다.

매일 읽고 보는 책은 한자투성이의 한적漢籍들이다. 나는 어떻게 고전공부를 평생의 직업으로 삼게 되었을까? 지금까지는 그런 생각조차 별로 해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내가 한문으로 된 책을 읽고 이것을 가지고 공부한다고 하면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본다. 어려서 서당에 다녔느냐고 묻기까지 한다. 글로만 읽다가 처음 만나면 내가 퍽 나이 든 노인인 줄 알았다는 사람도 많다. 나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입시공부에 시달리다가 대학에 들어왔다. 대학 때는 시인이 되려고 습작을 열심히 하고 문학회 활동을 했다. 서당을 다닌다거나 한문을 따로 배울 처지가 아니었다. 한문공부는 대학원 들어와서 뒤늦게 외국어 공부하듯이 했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 한문시간이 내게 고전의 매력을 일깨워준 첫 번째 계기였던 것 같다. 두보의 시 〈강촌江村〉을 배우는데 선생님께서 노래하듯 한시창을 들려주셨다. “처응가응일고오옥포촌류우〔淸江一曲抱村流〕하니” 하며 부르는 그 가락이 듣기 좋았다. 집에 와서 오르간 건반을 두드려 이것을 악보로 옮겨놓고 혼자서 따라 했다.

 

그다음부터 교과서에 나오는 한시란 한시는 전부 이 가락에 맞춰 다 외웠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 혼자 좋아서 외웠다. 틈만 나면 종이의 여백에 내가 외운 한시를 옮겨 적는 것이 당시 내 취미였다. 무엇이 그렇게 좋아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게 그렇게 재미있었다. 지금도 그때 외운 한시는 입에 붙어 있다.

(중략)

 

고전의 매력에 눈을 뜬 두 번째 계기는 뒤늦게 대학교 4학년 여름에야 찾아왔다. 학과에서 한문특강이 개설되었다. 외부에서 한문 선생님을 모셔와서 여름방학 특강을 했다. 고등학교 때 한시도 줄줄 외우고 했기 때문에 나는 내가 한문을 꽤 잘하는 줄 알았다. 처음 한 주는 서예반 탁본여행 때문에 빠졌다. 그 다음 주에야 처음 나갔다. 첫 줄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당시 한문강의를 맡으셨던 이기석 선생님은 《맹자》 강의를 하고 계셨다. 구절마다 소리를 내서 읽게 하고는 하나하나 짚어가며 해석을 시키셨다. 선생님께서 물어보셨지만 막상 하나도 대답하지 못했다.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그때부터 선생님을 모시고 본격적으로 한문공부를 시작했다. 대학원에 진학하면서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레 고전문학 전공을 선택했다.

 

 

 

처음 덤벙대며 덤비기만 하던 나를 선생님은 차분하게 가라앉혀주셨다. 공부를 하다가 해석이 안 되어 여쭈면 “사전을 찾아봐!” 하셨다. “찾아봤는데요?” “다시 찾아봐.” 그래서 사전을 찾으면, “무슨 뜻이 있지?” 하고 물으셨다. 이런저런 뜻이 있다고 말씀드리면 “거봐, 거기 있잖아” 하셨다. 뜻은 꼭 뒤쪽에 숨어 있곤 했다. 선생님의 사랑을 많이 입었다. 나도 선생님을 정성껏 모셨다. 그러는 사이에 조금씩 한문 문장을 읽는 문리文理가 났다. 구문이 보이고 행간이 읽히기 시작했다.
 

(중략)

 

고전을 공부하면서 만난 옛사람은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권필과 박지원, 정약용 세 분은 특히나 내 공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과 만나고 나서 나는 참 많이 변했다. 권필은 그 곧은 삶의 태도와 매서운 성정으로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정신을 내게 일러주었다.

 

박지원은 생각의 방법과 생각의 힘이 갖는 위력을 몸소 몸으로 보여주었다. 박지원을 만나고 나서 나는 생각하는 방식도, 글쓰기의 태도도 다 바뀌었다. 나는 그처럼 글을 쓰고, 그와 같이 생각하고 싶었다. 몇백 년 전에 죽은 옛사람의 글이 오늘의 내 삶에 이렇게 직접적으로 간섭하고 영향을 주는 것이 처음에는 아주 이상하게 느껴졌을 정도였다.

 

정약용은 위대한 스승답게 문제를 해결하는 온갖 과정을 꼼꼼하게 제시해주었다. 그의 효율적인 작업 방식과 정보 수집과 정리 방법은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방법과 아주 비슷했다. 친밀감을 느꼈다. 그의 저작을 살펴보면서 나는 그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런 작업을 해낼 수 있었는지 대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천재이기에 앞서 대단한 노력가였다. 앉아서 열심히 공부만 하다 보니 방바닥에 닿은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다. 혹독한 시련을 그는 새로운 기회로 만들었다. 좌절하지 않고 떨쳐일어나 큰 업적을 남겼다.
 

이 세 분 스승과 만나 내 삶의 눈길은 깊어지고 안목은 넓어졌다. 누가 옛사람을 죽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