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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나지 않았는가> - 로버트 거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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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년, "이 전쟁은 폭력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 승자와 패자 양측 모두 파멸했다. 황제나 왕위 계승자들 모두 참살되거나 폐위되었고 (…) 모두가 패배했다. 모두가 고통에 시달렸다. 그들이 내놓은 모든 게 소용없었다.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 살아남은 자들, 헤아릴 수 없는 전장의 나날을 버텨낸 참전 군인들은 승리의 화관을 썼든 재앙의 소식과 함께였든 간에 이미 파국에 휩싸여 있던 고국으로 돌아왔다.
_윈스턴 처칠, 《알려지지 않은 전쟁》(1931)

 

△ 이 전쟁은 폭력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것은 이 세계를 새로운 국경선과 새로운 사회들로 벼려낼 장이다. 새로운 거푸집들은 피로 채워지길 원하며, 권력이 굳센 주먹으로 휘둘러질 것이다.
_에른스트 윙거, 《내적 체험으로서의 전투》(1828)

 

 

1917년 여름 임시정부에 맞선 볼셰비키 쿠데타가 수포로 돌아간 뒤 레닌은 페트로그라드에서 도망쳐 이 위조 여권을 가지고 국경을 넘어 핀란드로 갔다.

 

서문

 

10년간의 전쟁으로 자극된 감정들이 스미르나 시를 덮친 것은 1922년 9월 9일이었다. 터키 기병대가 한때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번영한 국제 도시였던 곳에 입성하자 주민 가운데 다수를 이루는 기독교도들은 불안한 예감을 느끼며 이를 지켜봤다. 스미르나는 무슬림과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동방정교를 믿는 그리스계 기독교도가 수 세기 동안 그럭저럭 평화롭게 살았던 도시였다.

 

그러나 근 10년간의 전쟁은 도시 내부의 종족 간 관계를 변화시켰다. 1912~1913년 발칸전쟁들(1, 2차 발칸전쟁을 말한다. 이하 본문 곳곳의 설명을 참조할 것 — 옮긴이)로 유럽 지역 영토를 거의 다 상실한 오스만 제국은 1914년 8월 대전(흔히 영국과 영연방 지역에서 1차 세계대전을 가리킬 때 쓰는 표현. 이하 본문에서 ‘대전’이나 ‘세계대전’이란 표기는 특별한 설명이 없는 한 1차 세계대전을 가리킨다 — 옮긴이)에서 독일의 동맹국으로 참전했다가 이번에도 다시금 지는 편에 가담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로 ‘중동’으로 알려지게 되는 아랍 영토마저 상실한 패전국 오스만 제국과 굴욕을 당한 그곳의 무슬림 터키계 주민들은 곧 또 다른 위협에 직면했다. 그리스 침공군이 1919년 스미르나에 상륙한 것이다.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의 부추김을 받은 그리스 침공군은 1919년 스미르나에 상륙하여 기독교도가 부분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소아시아 영토에 자체의 새로운 제국을 건설할 작정이었다.

 

무슬림과 기독교도 민간인 양측 모두에 엄청난 만행이 자행된 3년간의 잔혹한 무력 충돌 뒤에 전세는 이제 확실하게 그리스 측에 불리해졌다. 무능한 지휘에 시달리던 그리스 군대는 터키 민족주의자들의 유능한 지도자 무스타파 케말에 의해 중앙 아나톨리아 내륙으로 유인되어 대책 없이 무리하게 확대 배치된 상태였다. 결국 그리스 군대는 케말 — 아타튀르크(‘튀르크인의 아버지’)라는 영예로운 호칭으로 더 잘 알려진 — 이 1992년 대규모 반격에 나섰을 때 붕괴했다. 궤멸된 그리스군의 황급한 퇴각은 서부 아나톨리아의 무슬림 주민에 대한 약탈과 살인, 방화를 동반했고 이는 스미르나의 기독교도 주민들 사이에 보복에 대한 근거가 충분한 공포를 자아냈다.

 

그러나 스미르나 시의 그리스 점령군 당국에서 나온 기만적인 안전 보장성 발언들과 스미르나 항구에 정박해 있는 무려 21척의 연합군 전함의 존재에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 주민들은 착각에 빠져 안심하고 말았다. 서구 연합국— 특히나 영국 —이 아테네의 스미르나 정복을 부추긴 만큼 아무려면 무슬림의 보복에 맞서 기독교도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이 개입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희망은 곧 도시를 둘러싸고 커다란 비극이 펼쳐지면서 기대와 어긋난 것으로 드러난다. 승리한 터키군이 스미르나를 함락한 직후 병사들은 그리스 침공을 거리낌없이 지지했던 동방정교 대주교 크리소스토모스를 붙잡아 그들의 지휘관인 사칼리 누레딘 파샤 소장에게 인도했다. 소장은 숙소 바깥에 모여서 대주교의 머리를 요구하던 터키 군중에게 크리소스토모스를 넘겨주었다. 이 일을 목격했던 어느 프랑스 병사가 회상한 대로 ‘군중은 목쉰 소리로 괴성을 지르며 크리소스토모스에게 달려들어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가 이스마엘이라는 유대인 주인이 문간에 서서 불안하게 밖을 살피고 있던 이발소에 도착했다.

 

누군가가 이발사를 밀치고는 흰 천을 집어서 크리소스토모스의 목에 두른 다음 “이발해”라고 외쳤다. 그들은 그 고위 성직자의 수염을 잡아 뜯고, 칼로 눈알을 도려내고, 코와 귀, 양손을 잘랐다.’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폭도는 고문당한 크리소스토모스를 근처 뒷골목으로 끌고 가 구석에 내던진 뒤 죽게 내버려두었다.

 

스미르나의 동방정교 대주교의 끔찍한 죽음은 17세기 유럽의 종교전쟁동안 적의 도시를 약탈하던 일을 떠올리게 하는 2주간의 광란의 폭력의 서곡에 불과했다. 다음 2주에 걸쳐 3만 명의 추정되는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이 학살당했다. 더 많은 이들이 터키 병사들과 준군사 조직원들, 현지의 십대 폭력배에 약탈을 당하거나 두들겨 맞거나 강간당했다.

 

9월 13일 오후 늦게 도시 내 아르메니아인 구역의 집들에 처음 불이 붙었다. 다음 날이 되자 스미르나의 기독교도 구역 대부분이 불길에 휩싸였다. 몇 시간 안으로 수천 명의 남녀와 아이들이 부둣가로 피신했다. 영국 기자 조지 워드 프라이스는 항구에 정박한 안전한 전함에서 흉악한 참상을 목격하고 ‘형용할 수 없는’ 상황을 기록했다.

 

 

 

(다음 포스팅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