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정보

재미와 감동을 전하는 작은 책방을 마련했습니다.
한 바퀴 찬찬히 둘러보시면 아마도 내일 또 오고 싶으실 거에요.

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NEW

나. 36. 이승엽

저자 이승엽
브랜드 김영사
발행일 2018.04.04
정가 15,000원
ISBN 978-89-349-9378-0 03810
판형 152X223 mm
면수 300 쪽
도서상태 판매예정
종이책
전자책
  • 등록된정보가 없습니다.

실력과 겸손의 아이콘, 이승엽이 전하는 9가지 인생 수업

내 인생에 최고의 승리 조건은 무엇인가?

 

우리 시대 국민타자, 홈런왕 이승엽이 은퇴했다. 프로야구 선수로 23년의 긴 여행을 마치고 자연인 이승엽으로 돌아왔다. 고등학교 졸업 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KBO리그 통산 홈런, 득점, 2루타, 1루타, 타점, 장타율 모두 최다기록을 달성했고, 8년의 일본 프로리그를 경험하고 한국에 돌아와 제 2의 전성기를 누리다 모두 만류하는 가운데 은퇴를 선언했다. KBO리그 최초의 은퇴 투어를 한 선수로 마지막 한 순간까지 최고의 영광을 누린 레전드.

그가 <나. 36. 이승엽> 책 출간을 통해 지금까지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의 숨은 노력과 고통, 수많은 선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지금 그를 만든 태도와 사람, 두려움과 고난들을 이겨온 시간들을 정리했다. 일 분도 허투루 쓴 시간이 없는 그 동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또 다른 선물을 남겼다. 그리고 그의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은 KBO 홍보대사로, 후배들과 꿈나무들을 위해 이승엽 야구재단을 설립해서 장학회 활동부터 시작하고 있다. 거창하게 이름뿐인 재단이 아니라 차곡차곡 야구계의 발전을 위해 지금까지 받은 사랑을 모두 돌려드릴 예정이다. 이 책의 수익금도 전액 이승엽 야구재단을 통해 기부될 예정이다. 단 한 시간도 야구 생각을 하지 않고 지낸 시간이 없던 그였기에 또 다른 도전과 기회들을 만들어갈 것이다. 진정한 그의 레전드는 바로 지금부터 다시 시작이다. 

 

 

책 속으로

 

그냥 어릴 때부터 공 던지고 치는 게 좋아서 친구들 모아놓고 나무 막대기 놓고 고무 공으로 맞추며 놀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왜 그렇게 좋았고, 무엇이 나를 야구의 매력으로 이끌었는지 정확한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저 동그란 공이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 조그만 공을 내 마음대로 던질 수 있는 게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운명이란 말을 이럴 때 하는 게 아닐까? 정확히 나는 그것이 야구인지도 몰랐다. 7살 때 생긴 프로 야구를 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야구라고 부르는 구나!’라는 걸 알았고, 매일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을 불러 당당하게 야구하자고 꼬셨다. 지금처럼 학원이나 사교육이 극성일 때도 아니고 서울 아닌 지방이라서 그렇게 부모님들의 학구열이 높지도 않았던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책가방도 바닥에 팽겨치고 동네에서 친구들과 야구라고 부르기도 뭣한 운동을 하고 매일 옷은 흙과 땀으로 범벅이 된 채로 집에 갔다.

 

만약 지금 운동선수가 되길 꿈꾸는 어린이의 부모님이 계시다면 말씀전하고 싶다. 돈 많이 버는 프로야구 선수로 키우겠다고 생각하시면 그 아이는 행복할 수 없다. 그 아이가 평생 행복한 운동선수로 커가려면 운동이 즐거워야 하고, 운동을 계속 하고 싶어야 한다. 타고난 실력이 있어도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는 질 수밖에 없고, 열심히만 해도 안 된다, 즐기는 사람에게는 이길 수 없다. 내가 야구를 계속 할 수 있던 비결은 이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난 야구할 때 가장 좋고 행복하다.

“아버지! 저 야구 선수 됐어요”

신발은 마당에 휙휙 날려버리고 안방으로 뛰어 들어가며 내가 한 말이다. 내 마음 속에서 가장 바라던 말이어서 감독님의 권유 한 마디에 벌써 난 마운드 위에 서 있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었다. 한 번 해야 한다고 마음먹으면 무조건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야구가 하고 싶다고 부모님을 무조건 졸랐다. 하지만 부모님은 내가 생각한 것과 강경하게 반대하셨다. 그저 막내 아들이 어른들의 충동질에 허파에 바람 잔뜩 들어 투정 부린다고 생각하셨다. 집안에 운동선수로 대성한 사람도 없었고, 그 당시 운동선수는 가정형편 어려운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는 편견도 심했다. 그렇다 보니 부모님의 걱정은 끝이 없었다.

여기서 내 고집은 끝나지 않았다. 가장 나의 큰 고집으로 유명한 한양대와 삼성 프로 입단 사이의 일이다. 참 많이 알려진대로 나는 삼성에 입단하기를 바랐지만, 아버지는 한양대 입학을 강력하게 추천하셨다. 정말 어렵게 어렵게 삼성의 입단이 결정되었다. 지금껏 내가 한 선택의 99%는 스스로 내린 결정이다. 어른들 눈에는 똥고집이라고 보였던 것들도 그때 내게는 절실하게 포기할 수 없는 나의 의지였고, 내 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후회가 없다. 부모님이 반대한다고 야구를 하지 않았다면 착한 아들이 될 수는 있었겠지만 야구 하는 걸 허락하지 않은 부모님을 평생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감독님의 좋은 인상과 나를 위해준 소소한 마음들이 내 인생을 움직였다.

나는 그전까지 메이저리그가 아니면 삼성에 남겠다고 했다. 그만큼 메이저리그에 갈 자신이 있었고 일본 진출은 전혀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 김재하 단장님은 내가 메이저리그 또는 삼성 둘 중 하나를 택할 것이라 믿으셨고 윗선에 다 그렇게 보고하셨다. 하긴 내 주변과 정작 본인인 나도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내 진로가 일본 진출로 급선회하면서 김재하 단장님께서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그래서 아직도 죄송한 마음이 크다. 메이저리그에서 뛰지 못한 이유는 단순했다. 에이전트와 내가 생각했던 기대치와 메이저리그에서의 평가는 다소 엇갈려서 조건이 너무도 안 맞았다. 나는 그 평가가 잘못되었고 당신들이 실수한 것을 증명해내고 싶었다. 마침 일본에서 입단 제안이 왔기에 일본 야구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일본에서 타자로 성공하는 게 쉽지 않다는 이유로 만류하기도 했다.

한국에 있을 때도 멘탈의 중요성은 어느 정도 느꼈는데 온전히 내 마음대로 내 실력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때에 따라 욕심을 내려놓고 팀을 위해 희생 플라이도 날려야 하고, 장타를 치고 싶어도 사인에 따라 번트를 대기도 해야 한다. 그리고 기회가 오면 반드시 잡아야 한다. 수비 실수를 하면 다음 공격에서도 위축되기 마련이고, 우리 팀에서 9점을 낸다고 하더라도 상대팀에게 10점을 내주면 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기는 경기는 계속 이기도록 지켜나갈 힘을 키워야 하고, 지고 있으면 포기하지 않고 이길 수 있다는 마음으로 계속 나를 믿어야 한다.

아내에게도 미안하다. 아내는 스무 한 살 어린 나이에 나와 결혼했다. 재능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을 텐데 운동선수의 아내로 살면서 많은 것을 포기했다. 그래도 힘든 티 안 내고 잘 버텨준 덕에 맘 편히 야구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아내가 힘들어 하거나 아쉬운 내색을 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 교육도 다 맡겨 놓아서 미안한 마음이 더 크다. 난 아이들에게 그저 좋은 아빠 노릇만 한다. 인상 쓰고 혼내는 일은 모두 아내의 몫이다.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도 참 고맙고 미안하다. 만인이 알아보는 사람의 아들로 피곤하고 말 못할 고민도 많았을 텐데 티 안내고 씩씩하게 잘 커줘서 정말 고맙다. 야구 경기의 결과에 따라 집안 분위기도 달라지고 모두 아빠의 스케줄대로 움직여야 했는데 불평 한 마디 안하고 늘 ’아빠가 최고!“ 라고 말해주는 아이들이 정말 최고의 내 아이들이다. 은퇴하면서 한 가지 약속한 것이 있다.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겠다는 것이다.

가장 큰 패인은 그에게 진 것이 아니다. 토끼와 거북이 경주처럼 내가 자만했던 것이고, 누군가를 의식하고 연습을 하거나 경기에 나가면 안되었는데 내 머릿속에는 우즈가 가득 차 있었다. 우즈가 다음 해에도 잘하라는 법은 없지만 내 마음 가짐을 바꿔야 했다. 제 2, 제 2의 우즈가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 일을 계기로 또 다른 누군가가 나를 넘을 수 있기에 절대 만족해선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시즌이 끝난 뒤 절치부심의 각오로 1999년 시즌을 준비했고 54홈런을 기록하며 생애 두 번째 홈런왕에 등극했다.

야구장에 일찍 가면 마음이 편안하고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처음부터 모범생은 아니었다. 일본 무대에 진출하기 전까지는 아슬아슬 대장이었다. 선수단 미팅 시간이 오후 3시 30분이었는데 10분 전에 도착할 정도였다. 하지만 삼성 복귀 이후 야구장에 가는 게 너무 좋아서 단 한 번도 지각하지 않았다. 야구장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하는 게 용품 정리였다. 배트, 장갑, 글러브, 헬멧, 스파이크 등 야구 용품은 내 분신과도 같다. 군인에게 총기 손질이 아주 중요하듯 야구 선수도 야구 용품을 손질하는 일은 중요하다. 매일 닦고 하나하나 세세히 살펴봤다. 일본 무대에서 뛰면서 몸에 배인 습관이기도 했다.

그러다 타석에 들어섰는데 초구, 2구가 파울과 스트라이크로 들어왔다. 타자는 투 스트라이크가 되면 90% 이상은 진다. 정말 끝났다고 생각했다. 왜 하필 올림픽에서 이런 일을 겪게 된 걸까. 이런 생각을 하다 죽더라도 혼자 죽자고 마음 먹었다. 내가 스윙을 돌려보고 스스로 납득이 가도록 자신 있게 돌려보자고 생각했다. ‘제발 한 번만’ 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공을 쳤는데 느낌이 달랐다. 스윙이 딱 된 거였다. 그 전까지 쳤던 스윙들이랑은 확실히 달랐다. 갑자기 자신감이 붙으며 그렇게 꿈 꿨던 기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구가 담장을 넘어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 나도 모르게 두 팔을 번쩍 들었다. 8회 1사 1루 2 대 2 상황에서 일본 대표팀의 좌완 이와세 히토키를 상대로 오른쪽 펜스를 넘기는 2점 홈런을 때려낸 것이다. 그동안 내 어깨를 짓눌렀던 부담감과 아쉬움을 말끔히 떨쳐내는 순간이었다.

야구에 만약이란 건 없지만 가끔 '프로에서 타자 대신 투수로 뛰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을 받는다. 나도 궁금하다. 아마도 1,2군을 오가면서 중간 계투로 뛰다가 일찍 은퇴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있다. 투수로서 성공의 꽃을 피우지 못한 책임이 내게도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혹사 여파로 팔꿈치 상태가 악화됐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깁스를 푼 뒤 재활 치료를 제대로 하지 못해 팔이 제대로 펴지지 않아 뼛조각이 생겼다고 한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경기가 있는 날에는 진통제를 먹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통증을 이겨낼 수 없었다.

2003년 12월 11일. 서울 모 호텔에서 기자 회견이 열렸다. 수많은 취재진이 내 앞에 있었다.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세웠을 때도 이정도의 열기는 아니었다. 평소와는 달리 유독 많이 긴장했다. 나는 가슴 속에 품어놓은 미리 준비한 A4 용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9년간 아들처럼 키워주신 삼성…" 그러는데 나도 모르게 울컥하기 시작했다. 기자 회견장 뒤편에 있던 구단 직원들과 눈이 마주쳤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1995년 입단 첫해부터 그때까지의 수많은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나를 금지옥엽처럼 대해주신 분들에 대한 고마움과 이별을 앞둔 아쉬움이 교차했다. 구단 직원들은 “네 선택은 틀린 적이 없었다. 계속 함께 하면 좋겠지만 네 선택을 존중한다. 삼성에서 했던 것처럼 일본 무대에서도 잘 해주길 바란다”는 덕담으로 자리를 마무리해주셨고 난 고개 숙여 감사의 마음으로 건네받았다.

요미우리 2군 시절은 내 야구 인생에서 가장 쓰디쓴 약같은 시간이다. 삼성에서 9년간 뛰면서 단 한 번도 2군으로 강등된 적이 없었기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2006년 정규 시즌 개막전부터 4번 타자로 뛸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라 다쓰노리 감독님과의 관계도 언제부터인가 멀어져 갔다. 2010년까지 2년간 불편한 동거가 이어졌다. 모든 건 내 탓이었다. 프로 선수는 성적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끝 모를 부진 속에 2군에 머무르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삶의 활력소 같은 건 없었다. 하루하루가 무기력의 연속이었다. 야구하면서 그런 적은 처음이었다. 어느날 큰 아들 은혁이가 “아빠 친구들은 경기하고 있는데 왜 아빠는 집에 있느냐”고 물었을때 가슴이 아팠다. 가장으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가족에게 미안했다. 몸과 마음 모두 지쳐갔다. 일본 생활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하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커졌다. 이른바 향수병이었다.

한국 복귀 소식이 전해진 뒤 삼성을 제외한 다른 구단들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다. 조건도 파격에 가까웠다. 하지만 내겐 삼성 말곤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구는 내가 태어난 곳이고 내가 프로 입단해서 계속 뛰었던 곳이다. 많은 도움을 받았던 곳이기에 삼성만 생각했다. 삼성이 아닌 타 구단 유니폼을 입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 역시 파란 피의 사나이 아닌가. 8년 만의 삼성 복귀. 파란 유니폼을 다시 입고 대구 시민야구장 타석에 들어섰을 때의 그 짜릿함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딜 가든 “이승엽 선수 정말 잘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을 텐데 고향에서 마음 편히 하시길 바랍니다”, “이 선수가 삼성 유니폼 입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는데 돌아와줘서 정말 기쁩니다”고 반겨줬다. 내가 심장이 제대로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36번은 이제 영구결번이 되어 이승엽 고유 번호로 남게 되었지만 사실 36번은 내가 원했던 번호가 아니었다. 야구 첫 시작을 27번으로 시작해서 27번을 원했으나 다른 선배가 달고 있었다. 또 투수 출신이어서 최동원 선배님의 11번도 원했는데, 역시 다른 선배가 가지고 있었다. 신인 선수 가운데 가장 늦게 계약하는 바람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남은 등번호는 딱 두 개 뿐이었고 그중에서 앞 번호인 36번을 고를 수 밖에 없었다. 오래 사용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1∼2년 쓰다가 바꿀 생각이었다. 하지만 2년차 데뷔 첫 3할 타율을 달성한 데 이어 3년차 정규 시즌 MVP에 등극하면서 ‘아, 36번은 내 운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36번을 계속 쓰기로 했다. 일본 무대 진출 후 33번, 25번, 3번을 달기도 했지만 가장 애착이 가는 등번호는 당연히 36번이다. 

 

 

  • 이승엽 (저자)

1976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녀석 고집 참 세다'는 이야기를 숱하게 들으면서 자라왔다. 한 번 하기로 마음 먹으면 무조건 해야 직성이 풀리는. 중앙초등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했고 경상중과 경북고를 거쳐 1995년 프로 무대를 처음 밟았다. 데뷔 3년 만에 정규 시즌 MVP에 오른 뒤 1999, 2001, 2002, 2003년 통산 5차례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았다. 홈런 하면 이승엽이라는 이름이 떠오를 만큼 홈런 타자로서 이름 석 자를 제대로 알렸다. 2004년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 야구로 범위를 넓혔다. 희로애락을 모두 경험하면서 한 단계 성숙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2012년 삼성에 복귀한 뒤 3차례 통합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다. 프로 선수로서 이례적으로 은퇴 시점을 예고했고 KBO리그 최초 은퇴 투어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야구 인생 2막을 시작한 이승엽은 KBO 홍보대사, 이승엽 야구장학재단 등 왕성한 활동을 전개할 예정이다.

목차

1장. 나는 이승엽

야구와의 첫 만남

기회는 생각지 못한 곳에서 온다

똥엽이의 고집

내뜻대로만 살 수 없다

마음으로 치고 머리로 뛴다

오늘도 달린다

지름길은 없다

다시 되찾고 싶은 것

 

2장. 가족의 힘

언제나 내가 더 미안하고 사랑한다

아낌없이 주고 간 어머니

이정표를 세워주신 아버지

어린 신부

아빠 반성문

다른 아버지가 되고싶다

 

3장. 나의 가장 강력한 무기

진정한 노력은 배반하지 않는다

나의 유일한 무기는 노력

야구는 나이로 하는 게 아니다

경산 볼파크의 별이 빛나는 밤

실패의 시작은 만족의 순간

칠 수 없으면 치게 한다

4장. 나를 믿는다

라팍에 가장 먼저 출근하기

내가 나를 믿지 못했던 순간

홈런을 치고도 고개를 숙인다

교과서에 나오다

나보다 훨씬 잘 나갈 후배들

 

5장. 후회 없는 선택

대학이냐, 프로냐?

투수에서 타자로 다시 태어나다

이상과 현실 그 사이에서

메이저리그에 왜 안 갔어요?

두번째 메이저리그 프러포즈

왜 아빠는 안보여?

불행의 끝

 

6장. 내 이름을 걸고

난 대한민국 대표다

밖에서 보는 마음

8회의 사나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7장. 최고의 당신!

최고라고 믿게 해준 백인천 감독님

더 나은 길을 찾아준 박흥식 코치님

투지를 키워준 김성근 감독님

오! 나의 고마운 스승님

스윙이나 한 번 더! 요시히코 코치님

야구인의 자세를 새로 배운 요미우리 자이언츠

정신 번쩍! 라이벌

좋은 지도자란?

 

8장. 이승엽만 아는 이승엽

그만두고 싶었다

나와의 싸움

한국 야구와 일본 야구

혼자가 아니다

교과서에 나오다

36번의 비밀

 

9장. 리스타트

아름다운 이별

마지막 마음

행복한 날

나만의 길을 만들어 달린다

희망의 이름으로

 

보너스. 이승엽의 야구 수업

7할의 실패, 3할의 성공

시작은 기 싸움부터

타격 준비

볼 배합 전쟁과 기본

4할 타자와 대척점

홈런을 치는 방법

가상의 상대 – 양현종

 

이 책을 마치며 

내 인생을 승리로 이끄는 방법

그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야구를 좋아했고, 야구 밖에 모르고 자라왔다. 아버지가 엄하셔서 많이 혼났지만 단식 투쟁을 불사할 만큼 끝까지 야구는 양보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는 물음에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네, 후회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이 자리에 섰다.

나의 선택이었기에 누군가를 탓할 수도 없었고 모든 책임은 내가 져야 하는 것이다. 부모님 탓을 할 수도 없고, 환경 탓을 할 수도 없다. 그때 그때 나를 잘 돌아보고 선택하고 집중하여 그것을 지켜나가는 힘을 키우는 것 그것이 지금의 이승엽을 만든 첫 번째 키워드이다.

 

나쁜 일은 없다, 지나고 보면 다 좋은 일

이승엽을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이 실패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에게도 큰 시련이 몇 번이나 있었다. 고등학생 때 까지 투수로 활동했으나 팔 부상으로 타자로 전향해야 했다. 다른 선수들보다 몇 배 이상 훈련해야 했고, 새로 태어나는 마음으로 야구를 다시 시작해야 했다. 미국 메이저리그 진출에도 자신있었지만 조건이 맞지 않아 일본으로 우회하기도 해야 했고, 일본에서 처음으로 2군 선수로 떨어지는 쓰디쓴 경험도 맛봐야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투수로 계속 활동했으면 이만큼 성공했을까 의구심이 생길 만큼 많은 기록들을 남겼고, 일본 야구를 통해 배운 것도 많고 나중에는 메이저리그 쪽에서 와달라는 프러포즈를 보냈고 거절할 만큼 그의 실력을 스스로 입증했다. 2군으로 떨어져서 더 많은 선수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고 오만한 마음을 내려놓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혼자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똥엽이’라 불릴 만큼 고집 세고 자신의 선택으로 지금까지 이뤄온 그이지만, 그를 믿고 지키고 키워낸 많은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고백한다. 선수보다 사람이 되라고 늘 가르쳐주신 아버지, 사랑으로 모든 것을 내어준 어머니, 나이 어릴 때 결혼해서 많이 어려웠을텐데 큰 사랑으로 이겨내준 아내, 유명인의 아이들로 불편한 것도 많을텐데 아빠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주는 아이들이 가족이란 이름으로 바탕이 되어주었다. 선수로서 양분을 주신 감독님, 선후배, 팀 동료, 라이벌 모두 그를 키운 고마운 은인들이다.

 

나를 믿지 못하는 순간에도 나를 믿는 힘!

생각지도 못한 곳에 위기가 기다리고 있기도 하다. 시드니 올림픽에서 카지노에 간 적도 없는데 누군가의 말장난으로 루머가 돌기도 했다. 중요한 경기 때 컨디션 난조로 성적이 좋지 않아 선수 교체시켜주길 바랄 때도 있었다. 처음에 메이저리그에 못 갔을 때도 많이 실망했고, 부상이 심해서 뛰고 싶은데 못 뛸 때도 있었다. 하지만 반드시 바로잡을 기회는 온다. 자기 자신이 부끄러운 일을 한 적이 없다면 주위에서 다 도와줄 것이고,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마음에 부응하여 나도 모르던 힘이 솟기도 한다.

 

나이를 든다는 것은 축복이다

마흔 두 살까지 선수 생활을 하게 되고, 그것도 한국에서 은퇴 투어까지 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될 줄 정말 몰랐다. 일본에서 몸 상태도 안 좋고, 성적도 안 좋아서 은퇴를 생각했고, 한국에 돌아오기까지 상황도 좋지 않아서 못 돌아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 이십대 때보다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받아들이고 더 훈련량을 늘리면 보강할 수 있고, 그 때를 기다리면서 준비해 놓으면 분명히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큰 기회의 문이 열린다.

 

모든 게임의 승부는 멘탈이 좌우한다

<나. 36. 이승엽>은 총 9장으로 이뤄져 있고, 마지막 10장은 보너스 장으로 이승엽의 야구 수업이 들어가 있다. 타자가 투수와 승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변수들을 생각해야 하고 경우의 수를 계산해야 하는 지 꼼꼼하게 펼쳐놓았다. 생생한 리포트를 위해 ‘가상의 상대 - 양현종 투수’와의 승부까지 그려주면서 타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과 판단력, 경기력 등을 알려주었다. 야구는 로봇이나 컴퓨터로 하는 가상 게임이 아니라 사람 대 사람이 하는 경기라서 실력도 좌우하지만 최대의 승부처는 멘탈에서 갈라진다.

 

 

 

추천사

그의 책은 내용 못지않게 문장들이 눈길을 끌었다. 뒤로 갈수록 한 문장이 한 줄을 거의 채우지 않는다. 쉽고 짧게 쓰기가 그렇게 어렵다는데... 그의 성격 그대로가 아닐까. 솔직하며 군더더기가 없다. 그는 야구도 그렇게 한 것 같다. 문득, 나의 초등학교 시절, 내게 처음으로 공받기를 가르쳐줬던 동네 고등학교 형들이 생각났다. 그들이 그랬다. “야구는 말이야...복잡한 것 같지만 단순해. 우선 겁이 없어야 해.” 맞다. 이승엽의 야구도, 야구 인생도 그랬다. - 손석희(언론인, 앵커)

 

올 프로 야구 시즌에 그라운드에서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어디에 있든 그가 우리의 국민 타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확실히 알았다. 그가 그간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다시 한 번 그의 노력과 열정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 유재석(MC, 개그맨)

 

그라운드에서 본 이승엽의 모습을 책에서 읽고. 유니폼을 벗은 후의 이승엽의 모습까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입니다. 이승엽과 우리가 함께 해 온 시간들을 슬쩍 떠올리며 웃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험한 길이었지만 함께 걸어온 우리도 이승엽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볼 수 있을 거예요. - 김제동(MC,방송연예인)

 

라이언킹, 이승엽, 대한민국의 국민타자! 이승엽은 중요한 국가대표 대회에서 늘 팀을 위해 큰 몫을 한 우리의 전설이다. 그가 힘차게 쏘아 올린 홈런들은 우리의 가슴에 긍지를 느끼게 했고 포기하지 않는 근성을 심어주었다. 이제 그의 기록들은 한 역사로 남겨질 것이다. 그 대단한 기록이 한국야구의 꿈과 목표가 되어 후배들의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키고, 그 과정에서 야구실력뿐만 아니라 인성과 품격도 훌륭한, 국민타자, 국민투수라고 할 수 있는 ‘국민선수’들이 많이 탄생하기를 기대한다. 선배들의 기록과 후배들의 도전. 이 시간들 속에서 우리의 야구는 계속해서 성장할 것이다. 좋은 야구선수이며 훌륭한 인성을 갖춘 이승엽이 앞으로의 길 또한 멋지게 펼쳐나가기를 응원한다. 더불어 이승엽과 함께 야구로 웃고 울었던 모든 사람들, 이승엽처럼 훌륭한 야구선수가 되기를 꿈꾸는 후배들이 이 책으로 삶의 소중한 원동력을 얻기를 바란다. - 박찬호(전 야구선수, 박찬호 야구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