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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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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와 외규장각 의궤를 지켜낸 법학자의 삶

국제법학자, 그 사람 백충현

저자 이충렬
브랜드 김영사
발행일 2017.04.14
정가 14,000원
ISBN 978-89-349-7772-8 03990
판형 148X215 mm
면수 300 쪽
도서상태 판매중
종이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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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독도 영유권의 결정적 증거, <관판실측일본지도> 최초 공개!

험난한 국제분쟁 속에서 학자적 양심과 탁월한 통찰로

조국과 인권에 헌신했던 백충현 교수의 최초 전기

 

동료들이 판검사로 입신양명을 꿈꿀 때 홀로 국제법 학자의 길을 선택했던 사람 백충현. 20대 후반부터 독도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에 매진해 국제법적 근거를 마련했고 이 책에서 처음 공개되는 사료인 <관판실측일본지도官板實測日本地圖>를 입수,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명백히 밝혔다. 또한 20년 동안 논쟁을 불러일으킨 프랑스 외규장각 의궤 반환 문제에 투신, 맞교환 정책에 반대하며 무조건적 반환을 일구어냈다. 재일 동포들의 지문 날인과 강제 퇴거에 저항하고, 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이 소멸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며, 아프가니스탄의 집단 학살을 세계에 알렸던 그 사람 백충현.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올곧은 양심으로 조국에 헌신했던 학자의 삶이 희소가치 높은 사료들과 함께 생생하게 펼쳐진다!

 

책 속에서

 

백 교수는 동아시아연구소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우리나라 국제법이 개발도상국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절실하게 느꼈다. 법대에 입학한 대부분의 학생들도 국내 사법 고시를 통해 판검사로 입신양명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다. 서교동으로 이사하면서 번듯한 서재를 갖게 된 백 교수가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냈다. ‘국제법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연구 모임을 가지면 좋겠군.’ 백 교수는 즉각 후배들의 의견을 물었다. 외무부에 근무하는 권병현, 김석우, 신각수, 정태익 서기관 등이었다. 백 교수의 제안에 갓 외무부에 들어가 패기와 열정이 가득했던 신참 외교관들은 이구동성으로 좋은 의견이라며 찬성했다. 연구회 모임이 있는 날 저녁이면 백 교수의 집은 외교관과 대학원 학생들로 북적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모인 인원이 한방에 다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마루 건너에 있는 다른 방을 사용하면서 양쪽 방문을 열어놓고 통방을 해야 했다.

-제1장 ‘외교력이 향상되어야 국민의 삶도 좋아질 수 있다’ 중에서

 

<관판실측일본지도>에는 경상도 남쪽은 그려져 있지만 그 오른쪽에 울릉도와 독도는 없었다. 일본 서북쪽의 오키섬은 그려져 있었다. 오키 섬과 독도의 거리는 157킬로미터였다. 백 교수는 <관판실측일본지도>에 도쿄에서 남쪽으로 약 1,0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오가사와라제도가 그려져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혹시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은 표기가 안 되어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가사와라 제도는 별도의 칸을 만들어 매우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백 교수는 일본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오가사와라 제도는 표기하면서, 그 4분의 1 거리에 있는 독도를 표기하지 않았다는 건 일본 영토로 파악하지 않았다는 의미라고 판단했다. 그는 일본과의 영유권 다툼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관찬 지도를 발견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백 교수는 <관판실측일본지도>를 반드시 입수하겠다고 다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12장 ‘아, <관판실측일본지도>’ 중에서

 

며칠 후 백 교수는 유엔인권위 관계자와 전문가 두 명과 함께 탈레반의 안내를 받아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역에 위치한 마자르 이 샤리프의 동쪽에 위치한 쉬베르간에 도착했다. 작년 5월 탈레반과 연합해 북부 지역을 관리하고 있는 도스툼 장군이 안내를 맡았다. 지난 5월, 탈레반들이 북쪽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총공세를 폈다. 이때 마자르 이 샤리프까지 진격해 북부 동맹군을 무장 해제시키려다 오히려 탈레반 민병대 3,000여 명이 포위되어 포로가 되었다. 포로들은 자신들이 교환된다는 말을 듣고 끌려나간 뒤 15미터 깊이의 구덩이에 강제로 들어가야 했다. 이를 거부하면 즉각 사살되었다. 포로들이 구덩이에 80~100명 정도 채워지면 수류탄을 던지고 흙으로 구덩이를 메웠다. 도스툼 장군은 백 교수 일행을 데리고 구덩이로 추정되는 곳으로 데려갔다. 탈레반 민병대가 구덩이를 파자 포로들의 시신이 드러났다. 너무 끔찍해 모두들 고개를 돌렸다. 도스툼 장군의 증언대로 100여 구의 시체가 있었다.

-제17장 ‘아프가니스탄의 집단 학살을 세계에 알리다’ 중에서

 

2000년 7월 18일 한불 민간인 3차 협상이 경기도 성남에 있는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열렸다. 우리 측 대표인 한상진 정신문화연구원장은 프랑스 대표 자크 살루아 감사원 최고위원과 이틀 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회의를 진행했다. 그리고 ‘등가 교환’이라는 대원칙에 의견 접근을 보고 프랑스에 있는 외규장각 반환 도서에 대한 목록과 우리 측에서 프랑스에 건네줄 도서 목록 등에 대해서는 양국 대표들이 협의를 거쳐 추후 발표하기로 했다. … 백 교수가 연구실로 돌아오자 기자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그는 “약탈당한 우리 것을 찾아오기 위해 우리 것을 다시 내주는 것은 저쪽의 행위를 정당화해주는 꼴이 될 뿐”이라며 “우리의 정당성과 권리를 포기하면서까지 동질의 문화재로 대가를 지불한다면 이는 이 문제를 미결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보다 무모한 처사가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외규장각 고문서는 국제법상 불법 점유 상태이므로 완전한 반환만이 해결책”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정부에 대해서는 “맞교환이라는 말도 안 되는 목표에 따른 성과주의부터 버려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제20장 ‘맞교환 합의에 분노하다’ 중에서

 

백 교수는 아내와 함께 바닷가로 나갔다. 파도 소리를 따라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다. 재일 동포의 지위와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국제법 논리로 목소리를 높이던 일, 내란 중인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집단 학살 현장을 찾아내 국제사회에 알린 일, 일본의 관찬 지도를 찾기 위해 도쿄의 간다 고서점들을 오가던 일, 충경당에서 <관판실측일본지도>를 구해 환호하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흘렀다. 학자의 길을 잘 걸었던 것일까. 우리나라 국제법의 수준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한국적 국제법을 위한 초석을 다지겠다던 나의 목표는 얼마나 이루어진 것일까. 아직도 못다 한 일들이 있는데, 생의 마지막은 왜 이렇게 빨리 오는 것일까. 그는 방파제에서 일어났다. 아내가 그의 팔을 잡았다. “여보, 이제 서울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인 것 같아.” 이명숙은 고개를 떨구었다. 2007년 4월 11일, 백충현 교수는 아내와 큰아들 영재, 둘째 아들 영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68세였다.

-제23장 ‘미완의 저서 《독도와 국제법》’ 중에서

 

  • 이충렬 (저자)

서울 출생, 1994년 《실천문학》을 통해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현재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거주하며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아, 김수환 추기경 1,2》《간송 전형필》《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 등이 있다. 실제에 근접하여 인물의 궤적과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장르인 전기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치밀한 자료 조사와 탄탄한 스토리텔링,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을 몰입시키는 드라마틱한 연출로 쓰여지는 글은 영혼이 담긴 다큐멘터리이자 소설 이상의 문학이 되고 있다. 이 책 《국제법학자, 그 사람 백충현》에서는 독도, 외규장각 의궤 반환, 재일 동포 인권, 종군 위안부, 아프가니스탄 집단 학살과 난민 문제 등 조국과 인권을 위해 헌신했던 백충현 교수의 생애를 복원하면서 최초 공개되는 자료인 <관판실측일본지도官板實測日本地圖>를 통해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서문-학문으로 국가의 자존심을 지킨 국제법 학자

 

제1부 국제법의 존재 이유

1. 외교력이 향상되어야 국민의 삶도 좋아질 수 있다

2. 국제법으로 일본의 책임을 추궁하다

3. 돌고래 프로젝트

4. 납치당한 중공 여객기의 한국 착륙과 국제법

5. 국제법 연구의 요람 서울국제법연구원을 설립하다

 

제2부 국제법 학자로서의 양심과 책무

6. 재일 동포와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발언하다

7. 국제법 논리로 프랑스가 약탈해간 의궤의 반환을 요구하다

8. 장남을 데려오기 위해 차남을 보낼 수는 없다

9.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책임은 소멸되지 않았다

10. 을사조약과 정미7조약은 국왕의 비준이 없어 국제법상 무효다

11. 일본의 집요한 독도 영유권 주장을 비판하다

12. 아, <관판실측일본지도>

 

제3부 국제사회를 향하여

13. ‘한국적 국제법’을 위한 학술지

14. 한국 최초로 유엔 고위직에 임명되다

15. 포화 속의 아프가니스탄에 가다

16. 한국 컴퓨터를 유엔 전산화 계획에 지원하다

17. 아프가니스탄의 집단 학살을 세계에 알리다

 

제4부 민족과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18. 드디어 나타난 <관판실측일본지도>

19.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만이 올바른 해결책이다

20. 맞교환 합의에 분노하다

21. 일제의 한국 병합 불법성을 세계에 알리다

22. 외규장각 의궤 맞교환 백지화되다

23. 미완의 저서 《독도와 국제법》

 

에필로그

백충현 연보

주석

인터뷰 및 참고문헌 

출판사 소개

 

독도 영유권의 결정적 증거, <관판실측일본지도> 최초 공개!

험난한 국제분쟁 속에서 학자적 양심과 탁월한 통찰로

조국과 인권에 헌신했던 백충현 교수의 최초 전기!

 

독도 영유권의 결정적 증거, <관판일본실측지도>

<관판실측일본지도官板實測日本地圖>는 일본의 유명한 지도학자인 이노우 다다타가伊能忠敬(1745~1818)가 17년 동안 일본 전역을 다니며 실측한 작업을 담아낸 지도로 후대 일본 지도 제작의 모본母本이 되었으며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일본 북쪽 오키섬은 잘 표현되어 있는데 울릉도와 독도는 있어야 할 자리에 없다. 오키섬과 독도까지의 거리는 157킬로미터, 반면에 도쿄에서 남쪽으로 약 1,0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오가사와라제도는 별도의 칸을 만들어 매우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그중 가장 큰 섬인 지치지마에는 산 이름과 만 이름까지 모두 표기되어 있다. 일본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오사가와라제도는 표기하면서 그 1/4 거리에 있는 독도를 표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독도를 일본 영토로 파악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최고 권위의 일본 관찬 지도에서 독도를 자국 영토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 책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관판실측일본지도>는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밝힐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다. 그리고 이 지도를 한국으로 가지고 온 이는 국제법학자 백충현(1938~2007)이라는 사람이다.

 

한국인이 기억해야 할 숨겨진 학자의 양심

이 책의 저자 이충렬은 김수환 추기경, 간송 전형필, 혜곡 최순우, 수화 김환기 등 근현대 인물들의 삶을 복원하는 데 천착해온 전기 작가다. 지금 우리 문단에는 근현대 인물에 대한 전기가 매우 적다. 일제 강점과 분단, 한국전쟁, 민주화 투쟁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끝까지 중심을 잡은 인물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널리 알려진 유명한 인물들을 다루어오던 저자는 이번에 낯선 인물인 국제법학자 백충현을 소재로 전기를 펴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백충현 교수는 사후인 2010년 독도 영유권 수호 유공자로 인정되어 국민훈장인 ‘동백장’이 추서되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일을 하다 간 사람인지 기억하는 이들은 지인들 외에는 거의 없다. 백 교수는 20대 후반부터 독도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에 매진해 국제법적 근거를 마련했고 독도 영유권의 결정적 증거인 <관판실측일본지도>를 입수했다. 또한 20년 동안 논쟁을 불러일으킨 프랑스 외규장각 의궤 반환 문제에 투신, 맞교환 정책에 반대하며 조건 없는 반환을 일구어냈다. 재일 동포들의 지문 날인과 강제 퇴거에 저항했고, 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이 소멸되지 않았음을 국제법적으로 증명하였으며, 유엔 인권 특별보고관으로서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집단 학살과 난민 문제를 전 세계에 알렸다. 백충현 교수는 한국인이 기억해야 할 숨겨진 학자적 양심이었다. 이 책에서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학자적 양심과 통찰로 조국과 인권에 헌신했던 법학자의 삶이 희소가치 높은 사료들과 함께 생생하게 펼쳐진다.

 

한국의 국제법을 선진국 수준에 올려놓다

1970년 하버드대학교 로스쿨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동아시아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일하던 젊은 법학자 백충현은 우리나라 국제법이 개발도상국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절실히 느꼈다. “국가 간의 분쟁은 외교의 힘으로 해결된다고 믿기 쉽지만, 외교의 힘은 항상 법적 이론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정당한 방법으로 행사될 수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갖고 있던 백충현은, 1972년 귀국 후 외무부에서 근무하는 후배들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국제법 연구 모임을 했다.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시대였기에 미국에서 구해온 국제법 책과 자료를 공유했고, 외무부 후배들에게는 공개 가능한 국제조약이나 국제사법재판소 판례 자료를 부탁했다. 그는 외무부에서 국제법이 연관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이론적 대응책을 조언했다.

백충현 교수는 국제법 연구 모임을 보다 체계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1984년 서울국제법연구원을 설립했다. 장소는 당시 외무부가 있는 광화문에서 가까운 종로구 사직동을 택했다. 당시는 복사기뿐 아니라 타자기조차 귀하던 시절이었다. 백충현 교수는 먼저 고성능 복사기와 문서 편집기를 마련했다. 자신이 꾸준하게 구했던 국제법 관련 서적과 자료들을 기증했지만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발생하는 국제법 현안들에 대해 빠르고 정확하게 대처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는 사재를 털어 주요 국가에서 발행하는 국제법 관련 정기간행물을 정기 구독했고, 국제법 학자들에게 필수적인 자료집과 신간 도서를 계속 구입했다. 그 결과 서울국제법연구원의 장서와 자료는 국내 최고의 수준이 되었고, 많은 외교관과 국제법 석박사 논문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그곳에서 밤을 새웠다. 1990년에는 자비를 출자하여 서울국제법연구원을 외무부 산하 재단법인으로 만들었고 1994년부터 세계적 수준의 국제법 저널인 <서울국제법연구>를 1년에 두 번씩 간행했다. 이처럼 백충현 교수는 한국의 국제법이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하는 데 산파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관판실측일본지도>의 입수 과정과 미공개 이유

이노우 다다타가가 측량한 지도가 <관판실측일본지도>로 만들어진 것은 메이지 유신 2년 후였다. 왕정복고로 권력을 잡은 메이지 천황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고 부국강병의 기치 아래 구미 근대국가를 모델로 학제·징병령·지조개정地租改正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했다. 메이지 정부는 유신 후 반란군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르면서 정확한 지도 제작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때부터 이노우 다다타가가 측량했던 작업을 축척 1:36,000의 지도로 제작하기 시작했고, 1870년에 1,214장의 지도를 지방별로 4권에 담아 <관판실측일본지도>를 간행했다.

백충현 교수가 <관판실측일본지도>를 처음 목격한 것은 메이지대학 박물관에서였다. 백 교수가 지도의 오키섬과 그 서북쪽 부분을 사진 찍으려 하자 박물관의 지도 담당 학예관은 지도를 촬영하지 못하게 했다. 백 교수는 독도를 자신의 영토로 인식하지 않고 있었다는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지도이기에 일본 정부에서 촬영 금지 요청을 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날 이후 일본의 지도 전문 고서점들이 모여 있는 간다神田 지역을 수차례 오가며 <관판실측일본지도>를 찾았다. 서점 주인들은 ‘그 지도는 보물 중의 보물이라 매물로 나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백 교수는 혹시라도 나오면 꼭 연락을 해달라며 명함과 국제 전화 비용을 봉투에 넣어 건넸다. 1997년 8월, 도쿄에 있는 고지도 전문점 충경당으로부터 <관판실측일본지도>가 매물로 나왔다는 연락이 왔다. 당장 일본으로 건너간 백 교수는 한 장의 낙장도 없는 완벽한 지도임을 확인한 후 1억 원의 거금을 들여 한국 땅으로 지도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백 교수는 기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당시 한일 양국 간에는 ‘신한일어업협정’과 ‘중간수역’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면서 독도 영유권에 대해 당분간 외교적 마찰을 피하자는 ‘신사협정’이 묵시적으로 이루어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관판실측일본지도>를 공개하면서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결정적 증거라고 발표할 경우, 독도 영유권 문제가 다시 두 나라 사이의 현안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컸다. 그럴 경우 오랜 협의 끝에 타결을 눈앞에 둔 ‘신한일어업협정’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개인의 영예보다는 국익을 택했다. 그 후에도 한동안 <관판실측일본지도>와 관련된 논문 발표를 미루다가 지병이 악화되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소개하는 <관판실측일본지도> 이미지는 아직 공개된 적이 없다.

 

위안부 문제에서 집단 학살까지 국제법학자로서의 책무

백 교수는 학자로서의 양심과 책무를 중요시했다. 1992년 1월 11일 일본 아사히신문은 주오中央대학의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교수가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육지밀대일기陸支密大日記>에서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관리 및 종군 위안부 모집을 직접 지시·감독·통제했음을 확인해주는 세 건의 문서를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그동안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취해온 “민간업자가 한 일이며 국가 기관이나 군이 관여했다는 단서는 없다”는 입장을 뒤엎는 최초의 증거 자료였다. 당시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일본 수상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1965년 한일 협정으로 국가 차원의 청구권은 마무리됐다”는 입장이었다. 백충현 교수는 “일본은 1965년 청구권 협상 당시 종군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면서 이를 이유로 청구권 협상의 대상으로 삼는 것조차 거부했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가 정식으로 논의조차 되지 않았었다. 따라서 위안부 문제는 미결 상태로 남아 있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책임은 1965년 한일회담에 의해 소멸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백 교수는 우리나라 정부가 “무역 불균형 시정 등 한일 간에 미묘한 현안이 수없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정신대 배상 같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과연 대승적 차원의 국익에 도움이 되겠느냐”는 태도에 대해 “위안부 문제는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국가적, 민족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공무원인 국립대학 교수 신분으로 국가가 한일 협정을 체결할 때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발생한 문제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백 교수는 국제법상 무엇이 정의이고 부정의인지를 알리는 것이 국제법 학자로서의 책무이고 존재 의미라고 생각했다. 똑같은 이유에서 백충현 교수는 을사조약과 정미7조약에 국왕의 비준서가 없어 국제법상 무효임을 밝혔고, 재일 한인에게 강제 퇴거 제도, 지문 날인 제도, 외국인 등록증 상시 휴대 제도, 재입국 허가 제도 등의 적용이 제외되어야 함을 주장했으며, 유엔 인권 특별보고관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탈레반과 반탈레반 간의 집단 학살을 전 세계에 알렸다.

 

외규장각 의궤 반환 문제에 투신하다

백충현 교수가 헌신했던 또 다른 분야로는 외규장각 의궤 반환 문제가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해군은 강화도에 침입해 조선군과 전투를 벌인 뒤 퇴각하면서 외규장각에 있던 5,000여권의 책 중 어람용 의궤 등 외형적으로 화려한 340여 권을 약탈해 프랑스 군함에 옮겨 실었고, 외규장각에 있던 나머지 책은 불태웠다. 그중 297권이 어람용 의궤였고, 프랑스 해군은 귀국한 뒤 파리국립도서관으로 보냈다. 외규장각 의궤 297권이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박병선 박사에 의해 알려지자 프랑스 측에서는 외규장각 의궤가 엄연한 프랑스 국가 재산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백충현 교수는 “국가 또는 왕실이 생산한 문건으로 법적으로 소유권이 변동될 수 없는 것”이라며 “한국의 왕실 문서를 프랑스 재산으로 등록한 것 자체가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무려 18년 동안이나 지속된 외규장각 의궤 반환 논쟁에서 프랑스 측은 줄곧 맞교환 원칙을 주장했다. 국가 재산을 내주는 것인 만큼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백충현 교수는 외규장각 의궤는 프랑스 측이 전시에 한국에서 약탈해간 것이기 때문에 전시국제법이 적용되어야 하며, 마땅히 조건 없는 반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프랑스 측과의 경협을 통한 이익을 고려, 문화재 맞교환을 추진할 때는 언론 기고와 성명 발표를 통해 민족적 자존심을 호소하면서 프랑스 측의 영구 임대 등 다양한 현실적 대안을 제시했다. 결국 2011년 3월 한국과 프랑스는 5년 단위 대여 갱신 형식으로 외규장각 의궤 반환에 서명했다. 백 교수가 마지노선으로 정했던 영구 임대와 큰 차이가 없는 형식이었다. 백 교수의 학문적 동지였던 이태진 서울대학교 교수는 “외규장각 도서들이 145년 만에 귀환한다는 보도에 접하여 지난 2007년 타계한 백충현 교수의 묘소로 달려가 이 사실을 큰 소리로 알리고 싶은 마음이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2011년 백충현 교수는 정부에 의해 ‘외규장각 의궤 반환에 기여한 주요 인사’로 선정되었다.

 

조용한 감동을 전해주는 평범한 사람들의 전기

백충현 교수는 앞서 이충렬 저자가 다루었던 김수환 추기경이나 간송 전형필에 비하면 비교적 평범한 인물이다. 그는 단지 국제법학자였고, 학자로서의 양심에 따라 모든 일을 처리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양심이 그로 하여금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들을 하게 만들었다. 독도 영유권의 결정적 증거인 <관판실측일본지도>의 입수, 프랑스 외규장각 의궤의 조건 없는 반환, 재일 동포의 처우 개선과 종군 위안부 문제의 책임, 아프가니스탄 집단 학살과 난민 문제까지…. 과거에 역사를 바라보던 두 가지 상반된 사관, 즉 영웅주의사관과 민중사관에서는 영웅과 민중을 위대한 존재로 인식했다. 영웅과 민중이 역사를 개척한다는 임무를 인지하고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나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자기 일에 충실한 평범한 사람들의 노력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에 가깝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이충렬 저자의 생동감 있는 필치는 이 책의 인물들을 생생하게 되살아나게 한다. 젊은 혈기가 가득한 서교동 집에서의 열띤 토론, 학문의 경계를 넘어 한 뜻으로 뭉친 역사학자 이태진 교수와의 우정, 특히 백 교수의 아내 이명숙 씨의 조건 없는 헌신은 조용한 울림을 전하며 잔잔한 감동을 준다.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